(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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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역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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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동학농민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통치 질서의 파탄, 세금제도 운영의 문란 등 혼란이 계속됐고, 심지어 기근이나 전염병 등과 같은 자연재해까지 겹쳐 왔다. 밖으로도 외국상선이 자주 출몰하는 등 서양의 침략 위협이 계속되는 통에 조선 전체가 안팎으로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때였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위기 속에서 조선의 대중들은 의지할 곳이 필요했는데 이 때 등장한 것이 동학(東學)이었다.

농민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도 역시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 출신의 몰락양반 최제우(동학교조)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860, 서학(천주교)에 대립하여 창시한 주체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봉건 지배계급은 백성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동학은 이에 대항하여 평등사상을 제시하였다.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일 뿐이었으나, 민중에게는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된 이념이었기에 이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동학이 빠르게 확대되자 조선 정부는 이를 체제를 위협하는 학문으로 지목하고, 1863년 교주 최제우를 체포하여 처형합니다.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탄압과 수탈은 계속됐는데 더욱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고을에서는 수령과 아전, 토호들이 교도들의 재산을 수탈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동학교단은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하기에 이릅니다. 교조신원운동이란 최제우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었음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자는 것으로, 동학공인운동을 의미한다.


공주 · 삼례집회

18921017일 충청도 공주(公州)에 모여 충청감사에게 소지를 올린 교도들은 지방관의 토색질을 금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자, 1027일에는 삼례(參禮)에서 전라감사에게도 소지문을 제출했다.


광화문 복합상소 · 괘서사건

지방감영에 호소만 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동학교단은 정부에 직접 복합 상소할 계획을 세웁니다. 참여자 40여명은 3일 동안 광화문 앞에서 동학의 공인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복합 상소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교도들은 서울 외국 공사관이나 교회당 앞에 서양인과 일본인을 강력히 배척하는 내용의 괘서(掛書)를 붙이기도 했다.


보은 · 금구 집회

광화문 복합 상소 직후 동학교도들은 보은에서 그리고 금구에서 집회를 열어 척왜양을 외치며 새로운 차원의 운동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괘서 사건을 주도했던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집회운동의 성격이 한층 더 무장되고 강력해지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18941월 한층 강화된 농민들과 교도들이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를 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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