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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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역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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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국외 정세

 

19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청과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는 청국 중심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제국주의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다. 일본은 자본주의 상품시장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원료공급지를 모색하여 동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를 이루고자, 조선과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조선과 중국 일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의 나라들로부터 개방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들 나라의 속셈은 세 나라를 자기 나라 생산품 판매 시장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식민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서구열강에게 문을 일찍 열었던 일본은 내부적 정치투쟁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만들어 냈다. 조선을 두고 근대화된 일본은 청나라와 치열하게 대립했다.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고, 마침내 조선과 일본은 1876년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맺고 인천부산원산항을 개항하기에 이른다.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면포 및 생필품 등을 가져다팔고, 조선에서 주로 쌀소가죽금 등을 가져갔다.

문제는 이것으로부터 발생했다. 일본이 요구하는 쌀을 수출하느라 정작 조선의 농민들은 쌀이 부족하게 되고 일본에서 들어온 값싼 면포와 생필품 등으로 조선의 면포 산업과 도자기 제조업 등 대부분의 수공업이 망할 위기에 몰리게 되는 등 민생이 파탄된다. 일본이 값싼 생필품을 미끼로 조선의 쌀을 마구잡이로 가져가게 되자 국내 쌀값을 포함한 조선의 물가가 폭등했다, 조선은 이제 막 상업이 시작 되어 시장경제를 만들어내는 단계였는데, 개항 이후 청나라와 일본, 서양의 상인들이 값싸게 생필품을 팔자 조선의 상업이 무너지거나 외국 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의 입장에서의 일본은 여전히 대국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선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일본은 자신들에게 큰 위협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수백 년간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어왔던 조선을 일본에 빼앗기는 꼴이었기에 청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조선을 두고 일본과 여러 차례나 격돌하였다. 1884년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은 김옥균 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들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청나라의 간섭으로 3일 천하로 끝나게 되면서 일본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조선침략을 위해 끊임없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서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텐진조약

텐진조약은 청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조약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는 사전에 문서로 통보하거나 양측이 동시에 출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민비의 요청으로 청국군이 조선에 동학군 진압을 위해 파병하자 아무런 요청이 없었음에도 일본군은 청나라의 파병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왔고, 이후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경복궁 점령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내정이 안정되자 조선정부는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철군을 거부하고, 오히려 1894621일 경복궁을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7.26 조일공수동맹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09일 일본군 진압대대를 인천항에 상륙시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청일전쟁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일본은,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할 목적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1894627일 성환 풍도 아산 평양 등지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817일 일본군 1만여 명과 청국군 2만여 명 간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 조선은 전쟁의 당사국이 아니었음에도 전쟁터가 되었고,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 백성들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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