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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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사

본문

. 동학농민혁명의 명칭

1894(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계 농민들을 주체로 하여 일어나 전라도 무장에서 기병 창의문을 발표한 농민혁명운동으로서

동학혁명 또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하며 2004.3.5.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등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통일되었다.


 

. 배경

문호개방 이전부터 조선사회에 있어 중세적인 통치체제의 모순에 대항하는 민란이 꾸준히 열어나는 가운데, 1876년 개항이 이루어진 이래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계속됨에 따라 농민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더욱이 지배층의 분열과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는 농민들의 살림살이를 막다른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에 <인시천(人是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교리를 내건 동학의 가르침은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 커다란 종교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교조 최제우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고, 교도들은 삼례집회(參禮集會, 1892), 1차 보은집회(報恩集會, 93), 복합상소(伏閤上疏), 2차 보은 집회 등을 잇달아 열고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 발단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부임하자마자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水稅)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에 대한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1천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들고일어나 94215(이하 양력)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저수지를 파괴한 후 해산했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李容泰)가 봉기한 농민을 동학의 폭도로 몰아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자 다시 분격한 농민들은 3월 하순 인근 고을의 농민들이 전라도 무장 동음치면 당산마을(지금의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 모여 창의문을 발표하였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내걸고 대대적으로 일어나 백산(白山)으로 진격, 인근 농민 수만 명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和中)을 총관령으로 삼고, 규율과 체제를 엄격히 하는 동시에 사람을 죽이지 말고 제물을 손상치 말 것,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왜병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서울로 쳐들어가서 권력자들을 소탕할 것 등의 4대강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동학교주 최시형은 이러한 혁명군의 움직임에 대해 접주(接主)들에게 통문을 보내 ()로써 난()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라며 전봉준 등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이미 동학교단의 상층부와 상관없이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발전해 나갔다. 이때. 전봉준의 통문을 받고 태안·무장·금구·부안·고창·홍덕 등의 동학 접주(接主)들이 각기 병력을 끌고 백산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

 

. 경과

농민군은 511일 전주에서 온 관군과 보부상군(褓負商軍) 수천 병력을 황토현(黃土峴) 싸움에서 깨뜨리고, 무장·영광으로 진격하여 부패관리들을 숙청했으며, 531일에는 전주를 점령했다. 그러자 정부의 요청으로 68일 청나라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은 톈진조약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했다. 이에 혁명군은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폐정개혁안 12개조를 타협한 후 전라도 53군에 농민적 자치기관이라 할 수 있는 집강소(執網所)를 세워 폐정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휴전은 혁명군에게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나라의 원군을 불러들임으로써 마침내 청·일전쟁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었다.

 

이에 동학군은 1012일 삼례집회를 시발로, 전봉준을 위시한 강경파는 최시형 등 북접교단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하고 북상(北上)을 결정함으로써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끝내 호응한 북접의 손병희가 이끄는 10만 호서군은 3()로 나누어 논산에 집결한 후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1021일 공주의 우금치 고개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결전, 분투를 거듭했으나 근대적인 훈련과 장비를 갖춘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혁명군은 곧 전라도로 후퇴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11월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 결과

1년간에 걸친 동학혁명은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나고 말았지만, 반봉건·반외세를 표방하며 일어난 국사 상 최초의 민족운동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갑오개혁을 불러왔으며, 대외적으로는 청·일 양군의 출병을 유발, ·일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혁명군의 하부구조는 상당수가 뒤이어 일어난 의병운동에 참여,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계속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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